2022년 회고

Posted on Dec 30, 2022

다사다난 했었던 1년이 이제 곧 지나간다.

서른살이 되던 21년,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개발자로 전향을 목표로 목숨을 걸며, 1년간 치열히 살았던 기억밖에 없다.

그리고 22년 올해가 시작되는 1월, 적성에 맞는 적절한 직업을 찾게 되었다.

중국 왔다갔다하며 쓰던, 27인치 캐리어에 옷가지 몇벌과 취업 축하한다고 어머니께서 사주신 깔끔한 코트 한벌 들고 상경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고,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점점 나아졌다. 그 속에는 나를 좋아해주는 좋은 동료들이 있었다.

회사 다니면서, 먹고산다는 핑계로 많은 것을 손 놓고 지냈던 것 같다.

일도 그렇고 22년 후반기에는 자기개발도 많이 없었다.

개발 할 때도 두번, 세번 생각하고 코드를 쳐야 하는데, 빨리빨리 대충 개발 하려고 했었다.

또, 지나간 코드를 다듬는 시간도 필요 했는데, 그런게 많이 부족했다.

취직에 성공하며, 월급을 받아 잠시나마 행복했지만 깨달은 점은 월급쟁이는 항상 쪼들리며 사는 것 같다.

투자만 안했어도, 근근히 적금들며 살았을 것 같다. 투자로 인한 손실이 꽤나 컸다.

불장일때나 베어장일때나 마이너스인 나는 투자를 하면 안되는 것인가 싶다.

불장일때 주린이 었던 나는 쉽게 투자를 성공했었고, 점점 담이 커져, 감당못할 레버리지도 사용했었고, 손실을 입었다.

올해는 시작부터 베어장이었는데, 저점은 여전히 알 수 없다. 떨어질때마다 물 타던 계좌가 어느덧 모아둔 돈 대부분이 주식 코인 계좌에 가있다.

위험 부담을 느낀 만큼 나는 부자가 될 것이다.

첫이사 - 독립, 고생길시작

아무것도 없었던 나는 상경하고 무작정 회사 근처 고시원으로 들어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차비라도 아껴보자 싶어, 회사 바로 앞에 있는 고시원을 알아봤다. 그것 또한 자리가 없어서 다른 곳을 알아봐야했다.

알아보다 보니, 모란쪽에 되게 모양만 그럴싸하게 잘 꾸며놓은 고시원이 있었다. 짐싸들고 무작정 찾아갔다. 잘모르는 상태에서 방을 보지도 못했고, 이미 짐을 다 들고 나와서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첫 한달은 회사 적응하랴 고시원에서 생활하랴 버티고 또 버텼다.

창문도 없는 1평짜리 방에서 잠시 지내며, 폐쇄공포증이 이런거구나 몸소 느꼈다.

운좋게도 회사 바로 옆에 처음에 봤던 고시원에 자리가 났다고 했다. 근데 가격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창문없는 방과 창문있는 방은 거의 월세 20만원 가까이 차이가났다.

1달 살아본 결과 무조건 창문이 있는 방으로 가는게 맞다고 생각했고, 이사날 또 사건이 터졌다.

1달 지내고 이제 퇴거 하려는데 공용공간에 맡겨둔 캐리어가 없어졌다.

너무 열이 받아 범인을 꼭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달밖에 살지 않아서 퇴거한 인원이 몇명없어서 수사망을 좁히는데 성공했다.

cctv기록은 뭐 거의 있으나 마나식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몇명에게 고시원관리자가 연락해 자백을 받았다고한다. (자백이라기 보다는 실수로 가져갔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다.)

한 스무살 정도로 보이는 애였는데, 끝까지 건방진 태도를 봐서 정말 처벌하고 싶었는데, 마음이 약해져 또 그냥 넘어가줬다.

두번째이사 - 전세 구하기 여정

두번째 집은 한 2~3평정도 되는 화장실이 포함된 원룸텔이었다. 조금 넓어지고 창문이 생겼다고, 숨통이 좀 트였다.

하지만 이곳도 불편한건 마찬가지였다. 고시원장이 되게 까탈스러워서 내내 상주하며 짜증을 내는 소리를 들어야했다.

여전히 전화도 마음대로 못하고 답답하게 지내야했다. 빨리 이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웬만하면 전세로 가고 싶어서, 몇개월동안 회사다니며 전세집을 알아보고 다녔다.

이 건물이 또 상가건물이라 엘레베이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랑 마주친다. 이때 코로나를 걸렸다.

처음에는 월급도 받고 Flex한다고 근처에 매번 먹으러 다녔다.

그쪽 근처가 물가가 다 비싸서 맨날 사먹고 다니니 남는게 하나도 없었다.

뭔가 박봉은 아닌거같은데 세상이 나를 박봉화 시킨다.

최대한 아껴보자 싶어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쟁여놓고 먹었다.

가끔은 공용공간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는데 또 고시원장이 눈치를 많이 줬다. 고시원장 때문에라도 빨리 나가고싶었다.

돌이켜보면, 이때 당시가 부동산 폭등의 정점이었을 때라서 전세가격이 어디든 너무 높았다.

일반적인 전세를 가기에는 갖고있는게 너무나 없었다.

그래서 21년도에 LH청년전세대출에 당첨되어 있어서, 그 방법 밖에 전세 구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LH권리심사가 엄청나게 까다롭다.

대부분 대출을 많이 끼고 집들을 매매하기 때문에, 웬만한 집들은 LH로 들어가기 힘들다. 20~30년 된 오래된 구축 빌라들만 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이때 돌아다니고 출퇴근 편하려고 작은 오토바이 하나 샀다. 연비가 1리터에 60km를 간다고한다. 요즘은 날도 춥고 위험해서 잘 안탄다.

오토바이 타고 봄 ~ 여름에 집보러 다니며 많이 돌아다녔다. 경기남부 지역은 웬만한 곳은 대부분 돌아본 것 같다.

어떻게든 분당으로 집 구하고 싶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게 해서 내려가다 보니 수원까지 갔다.

머리를 좀 굴려봤다. 어떻게 하면 신분당선을 타고 출퇴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역 앞은 너무 비싸서, 버스타고 역 앞까지 갈 수 있는 최적의 동선을 찾았다.

운좋게 리모델링 하는 LH대출 가능한 전세집을 찾게 되었고, 도배가 안되어있었는데 딱보니 구조도 괜찮은 것 같아 계약을 했다. 2룸에 14평이었다.

두번째 이사를 하고 세달정도 걸렸던 것 같다.

세번째 이사

이사 전에 빈집이었기 때문에, 오토바이로 짐을 조금씩 여러차례 옮겨놨다.

오래된 빌라 촌의 귀신나올 것 같은 비쥬얼이지만 나름 안에는 잘 꾸며놨다. 전세집이다보니 가전 가구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직접 다 샀다.

이사 이후로 한동안 하나씩 맞춰가는 재미도 있었다. 당근에서 가져온 것들이 많았고, 세탁기같은 웬만한 가전은 찝찝하기도 하고 용달비 이런거 생각하니 그냥 새로 샀다.

오래된 건물이라 벌레나 단열 문제가 걱정이 되긴 했다. 요즘 추위는 창문에 뽁뽁이 붙여놓는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살아야하니 문풍지나 이것저것 또 붙여야겠다.

그래도 내 공간이 많아져서 집에 있으면 나름 편안하다. 항상 생각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다.

목표는 이 집에서 오래 살다가 돈을 모아서 매매하는게 목표이긴한데, 돈모으기가 쉽지않다.

월급날만 되면 이놈 저놈 가져가버린다. 자본주의 양아치들이랑 함께 사는게 그렇게 쉽지않다.

코로나 종결?

코로나는 끝이 없었다.

19년 12월에 어느 뉴스를 보고 포스팅한게 생각이 난다. 워낙 가짜뉴스들이 많아, 21세기에 무슨 중세시대 페스트같은 전염병이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였고.. 그게 22년도가 지나고 있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올해 초에 한국은 실질적으로 위드코로나를 실시하여 나도 한번 걸려서 죽다살았다.

3차까지 맞은 백신 이후 1주일 채 되지 않아 걸렸기 때문에 백신에 대해 의문이 들긴했었다.

중국은 이제서야 위드코로나를 한다고 하여, 벌써 절반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주가도 다시 올라가고, 빨리 모든게 정상화 되길 바란다.

회고

내가 올해 1년간 많은 성장을 했나 물어본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올해는 정말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 한 기억 밖에 없다. 사실상 불안정하고, 가장 힘든 시기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운이 좋아서 지금까지 버텼고, 또 최악의 상황에 맞춰서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개발자로써의 커리어도 잡으려면 당장의 걱정을 접어두고, 좀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지내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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